소통의 새로운 형식   







포도아가씨
포도아가씨: 이번 <평범한 이방인>과 같은 ‘비물질화’된 작품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김홍석의 그간의 행보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라운 일은 사실 아니다. 현재 서구 평론가들이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을 공격하는 똑같은 질문을 하겠다. 60-70년대 활발했던 개념미술의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 또는 ‘비물질화’와 2011년 김홍석의 <평범한 이방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홍석: 이번 나의 작품을 60-70년대 개념미술의 ‘관객과의 직접적 소통’이란 맥락으로 보면 형식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윤리를 바탕으로 퍼포먼스를 기획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60-70년대의 퍼포먼스에서 작가 본인이외에 초대된 참여자의 위치는 결국 그 작가의 권위 속에 사라져 버렸지만, 이번 나의 작품의 경우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기획된 퍼포먼스인 만큼 그렇지 않다. 따라서 ‘비물질화’라는 용어가 이번 나의 작품에 개입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별로 흥미롭지 않다. ‘비물질화’는 이미 현대미술 도처에 유화 물감 만큼이나 널려 있다. 전시 <평범한 이방인>의 <사람 객관적>이란 작품은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 미학>에서 소개되는 일부의 작가들의 개념과는 다른 지점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작가인 티라바니자의 초대에 응하고 그의 제안대로 움직여 주는 능동적 주체이지만, 불행히도 편협한 민주주의적 해석이라는 오류가 눈에 띤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등장해야 작동되고 완성되는 그의 작품에서 등장했던 사람들은 결국 사라져 버리게 되고, 작가의 권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유토피아적인 태도는(식당, 휴식 공간, 소규모 커뮤니티 공간을 통한 평화, 공존, 친절, 선함) 민주주의가 갖는 갈등과 대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할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의 초대에 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아니라 ‘특정 사람들’로 보여 지기 때문이며 그가 제안하는 초대를 이해할 사람들은 보편적 사람들이 아니고 특정한 문화권이 소속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만들어 낸 대화체계일 뿐이고 그들끼리 만족하고, 자축하는 관계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미술가는 형태를 생산하는 것이지 실질적 효력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왜 진짜 사람들을 개입시키는 것인가? 차라리 리얼리즘 회화가 타당하지 않을까? 관계적 미술은 커다란 저항 없이 성장해 왔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 소외를 다루는 미술일수록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일부 비디오 작품을 보면, 퍼포먼스가 선행된 후 기록된 영상을 작가 본인의 해석에 의해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퍼포먼스와 비디오의 차이를 모르고 퍼포먼스를 비디오로 전환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고 그러한 비디오 작품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경우는 약자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작품의 권위에 희생이 되어 진 하나의 파편적 이미지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객참여적 미술’과 ‘사회참여적 미술’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사람들’에 대해, 더 나아가 ‘관람자’와 ‘참여자’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사람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윤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다.

개인적으로 전시 자체를 즐겼지만, <사람 객관적-평범한 예술에 대해>의 다섯가지 소고 중 <윤리적 태도에 대한 소고-사람을 미술화하려는 의지>가 흥미로왔다. 물론 여자 퍼포머가 슬픔에 대해 이야기 한후 실제로 눈물 한방울을 눈에서 흘러 내리게 했다는 연극성과 그것의 ‘재현성’에 대해 생각해 볼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한 여성이 여러명의 관객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것’에 대한 김홍석 방식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각 하는가?

그 퍼포머는 나와 오랜 시간 물을 미술화하려는 나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퍼포머는 청동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작품을 미술화하겠다는 나의 기존의 아이디어 대신에 자신이 연기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이 되기를 요청했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내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나는 일말의 후회가 없다. 나는 관람자과 퍼포머(참여자)간에 발생하는 윤리적 상황에 대해서는 개입하고 싶지도 않으며, 더구나 그로인해 발생하는 어떠한 문제에도 관심이 없다. 만약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퍼포머 혹은 관람자에게 불편이 발생한다면 나의 기획 하에 진행된 퍼포먼스인 만큼 나의 책임이 불가피하겠지만, 나는 나(발화자)와 퍼포머(참여자)와의 관계만이 중요했다. 나는 퍼포머와의 윤리적 관계에만 집중한 셈이다.

<사람 객관적> 프로젝트는 배우를 고용해서 작가가 쓴 스크립트를 배우에게 주고, 배우는 그것을 자신이 이해한 대로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작업이잖아요. 이 작업은 이전의 번역 작업, 김수영의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 등과도 연관이 많은 것 같아요.

번역이라는 건 태생적으로 소통의 열망에 대한 게 아닐까 싶어요. 외국어를 어느 나라의 특정 언어로 바꾸는 것 외에도 ‘번역(translation)’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번역이 생기기 위해서는 번역을 열망하는 주체가 있어야 해요. 번역은 상대를 알고자 함이고 자신의 변화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번역은 결여를 인정하는 자들의 행위인 셈입니다. 사실 결여가 아닌데도 말이죠.

이해할 수 없거나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번역이 필요하죠.

그렇죠. 이해는 하고 싶은데 못하기 때문에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원본을 번역자에게 던지는 사람, 다시 말하면 텍스트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텍스트가 번역되는 과정을 볼 때 그것이 재밋거리가 되겠지만, 번역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과정과 결과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항상 번역을 원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번역이 되기를 바라는 주체였어요. 외국 것을 보면 쉽게 반하고, 어디에서 그 음악을 들어봤다, 그 영화를 봤다 같은 이야기들을 하죠. 그게 뭐냐면 자기 쪽으로의 번역 과정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를테면 정보를 주입하면서 자율적으로 그쪽으로 편입하려고 하는 거죠. 자기가 열망하는 공동체 안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거예요. 반대로, 열망의 주체였던 우리가 타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열망도 있어요. 70년대에 한국의 어린 아이들이 외국에 나가서 부채춤을 추고 외국인들에게 박수 받는 장면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어요. 일단 춤이라 하면 비언어적이니 타인들에게 소개하기 쉬운 문화였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것부터 소개하고자 했고, 나아가 우리의 언어로 쓰여진 문학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외국에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게도 이런 유형의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정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무언가 나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게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하는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은 그런 상승에 관련된 욕망을 갖고 있어요. 조금 적절치 못한 비유를 하자면, 파리에서 유학한 미술가는 어떻게 하면 내 작업에서 프랑스적인 냄새가 날까 하고, 한국에서 공부한 미술가와는 뭔가 다른 차이를 두고 싶어하죠. 이 사람들이 자기가 번역한 것을 갖고 또 하나의 새로운 번역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번역된 것을 우리가 보게 될 때는 한국에서는 소통되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통하지 않는 경우가 벌어지죠. 완벽하게 번역된 게 아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읽힐 수가 없는 겁니다. 말하자면 번역이란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의 열망에 다름 아닌 거예요. 번역은 오독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이미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나 번역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이것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죠. 전 세계가 글로벌화되고 심지어 하나의 언어로 통일된다고 하더라도 번역은 항상 있을 겁니다. 제가 배우들과 같이 작업하게 된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해석 때문이었습니다. 작가로 대표되는 저와 작품을 해독하는 참여자 사이의 내용, 그리고 작품의 참여자가 수용자인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내용은 우리의 번역의 역사와 같은 맥락으로 작용합니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한국인에 의해 쓰여진 세계사라든가 번역극, 오페라, 또는 노벨 문학상을 탄 소설을 번역한 책 등이 이러한 예가 될 겁니다. 번역은 진짜를 위장한 가면이 아니라 우리에겐 익숙치 않지만 이미 존재하는 소통의 새로운 모습입니다.

평소 예술작품의 윤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번에 <퍼포먼스, 윤리적 정치성>이란 제목의 책이 출판되는 것도 전시의 부분이다. 화제가 되었던 <창녀찾기> 퍼포먼스는 그 ‘윤리적 정치성’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번 <사람 객관적-평범한 예술에 대해> 작품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창녀찾기>로 불리는 작품은 하나의 조그만 공고문에서 비롯되어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그들의 본의와 상관없이 참여하게 되는 퍼포먼스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한 명의 여배우와 협업을 하였는데, 이때에도 나는 나(미술가)와 배우(참여자)간의 모종의 거래가 내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매춘부로 오인 받는 역할을 해달라는 나의 요청은 그 배우에게는 일종의 모험이었고 우리 두 사람은 소위 개런티라 불리는 돈거래를 통해 서로에게 어떠한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합의의 과정을 가졌다. 대사 한줄 없고 지정된 행동이 없는 상황에서 그 배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했고 나는 이것으로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내가 지시한 공고문의 내용과 별개의 행위를 취했다고 하더라도 나와 그 배우간의 합의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내겐 여전히 완성된 작품을 보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작품에서 관람자는 매우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을 요청받게 된 셈인데, 이 경우 작가인 내게 직접 다가와 특정한 행동을 보여준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번 경우에서 관람자는 내가 지시한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떠한 이도 다른 해석을 하거나 돌발적 행위나 판단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 객관적>에서는 관람자의 태도가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경우는 불의의 일격을 당한 관람자가 아니라, 자신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이미 내가 제공했기 때문이다.

<창녀찾기>가 작가-퍼포머 의 약속에 의해 시작되어 연기자-관객의 관계에서 결국 관객이 ‘참여자’가 되어 윤리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는 것은 십분 이해가 된다. 이번 퍼포먼스<사람 객관적-평범한 예술에 대해>에서 연기자-관람자 간의 이런저런 관계에 대해 작가가 전적으로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번 퍼포먼스에서는 작가-퍼포머 간에 작가의 권위를 최소화 하고 퍼포머-관람자 간에 무언가가 새롭게 생성될수 있기 때문에 작품이 윤리적 입장을 갖게 된다는 것인가? 강조하고 있는 ‘나(발화자)와 퍼포머(참여자)’ 사이의 관계와 윤리에 대해 좀더 설명해 달라.

앨런 캐프로우(Allan Kaprow)와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작품의 참여자는 곧 공공적 사람(공중 公衆)을 의미하고 이들은 작가(발화자)의 대변자이거나 대리인으로써 작동되는 것이 아닌 직접적 발화자로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와 참여자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합의(consensus)된 대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합의는 이들 작품에서 중요한 지점이며 이것은 참여자와 관람자들이 만나는 다음 단계와는 아주 다른 별개의 개념으로 작용한다. 나의 작품에서도 윤리적 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참여자(퍼포머)와 관람자와의 만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참여자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둘 사이에는 힘의 균형이 있어야 하고, 평등한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언급한대로 작가의 권위를 최소화한다는 뜻은 이 단계에서나 가능하며 공동의 합의를 얻고자 하는 서로의 태도와 합의된 내용에 대한 참여자의 표현에 스스로의 책임을 다할 때 윤리적인 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인 참여자(퍼포머)와 관람자들간의 만남에서는 작가인 내가 직접적 개입을 할 수 없다. 이들은 나와 참여자들과 같이 공동의 합의를 전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참여자(퍼포머)와 관람자들간의 관계가 윤리적일 근거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윤리적이던 아니던 이 부분은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에 있으며 개입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이 관계는 말 그대로 현실 그 자체이고 우리의 삶의 단편일 뿐이다.

작가-연기자-관람객 사이에서 작가에 의해 발화된 원본 텍스트가 변조되고 어느정도는 즉흥적이길 바랬던 것으로 작품설명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어느정도 그것이 성공적이었는가? 참고로 난 퍼포머들에게 간단한 질문들을 던졌는데 퍼포머들은 그다지 관람자들과 활발한 대화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원래의 계획은 아트선재센터에서 행해진 작품의 내용과는 매우 달랐다. 이 작품이 만약 다른 나라에서 행해질 가능성이 있다면, 배우가 아닌 일반 사람들과 하고 싶다. 원래의 계획은 미술가들, 큐레이터들, 그리고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을 이번 작품의 참여자로 초대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서상 일반인들과 큐레이터들은 매우 수줍음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바쁜 스케줄로 인해 모두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내가 알고 지내던 배우들에게 요청하게 되었고 나는 배우들에게 오랜 시간 미술에 대한 설명을 할애해야 했다. 배우들은 내가 텍스트를 제공하자마자 암기부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 날 만나 이야기하다가 나는 매우 기이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내가 제공한 글은 대본이 아니라 문어체로 쓰여 진 일종의 에세이였는데 이것을 마치 이야기꾼처럼 입으로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우 난감했고 배우들은 모두 나를 원망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제공된 텍스트가 대본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지침서라고 다시 설명해야 했다. 결론적으로는 나와 배우들 간에 굉장히 많은 시간을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냈고 이 시간이 힘들었지만 내게는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 행복한 이유는 그들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고 서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대화를 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나의 작품은 이 지점에서 완성되었다. 배우들이 나와 미술에 대해 오랜 시간 대화를 했다고 해서, 수준 높은 관람자들의 모든 유형의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매일 반복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겪다보면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퍼포머가 불성실한 태도로 임했던, 극단적으로는 관람자들을 모욕했던 간에 그것은 그들의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부분은 내가 개입할 수 없는 부분이며, 개입하는 순간 이것은 조작된 공연 그 이상도 아니게 된다. 조작된 공연이 우습다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의 완성은 나와 퍼포머간의 대화까지라는 것이다. 전시장(공연장, 만남의 공간)은 엄밀히 나의 작품이 아닌 것이다. 상황 설정까지만이 나의 작품인 것이다.

표현 수단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사용하셨다는 거죠

그렇죠. 그때 저의 퍼포먼스는 하루 동안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비디오와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당시엔 퍼포먼스가 저의 표현의 궁극점이었고, 기록은 후차적이었던 겁니다.그런데 저의 실제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보다 비디오와 사진으로 보게 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죠. 퍼포먼스 현장에 있던 관람자와 나중에 비디오로 보는 관람자는 다른 거죠.

<말특정적 프로젝트>는 4명의 초청된 강사가 앞으로 진행될 작업을 구술로 전달하는 작업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이 강의들을 듣지 못했는데 이 역시 4명의 강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변형되는 ‘구술성’의 맥락 이었나?

아니다. 변형되는 구술성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정착된 구술성이다. 잘 짜인 말들, 즉 강연은 구전될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수강자들의 뇌 속에 꽉 박아 넣어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다시 꺼내어져 재조립되는 속성이 있다. <사람 객관적>과는 달리 <말 특정적>은 관람자의 현장성보다는 화자의 권위를 강조하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사람들 간의 대화가 아니라 특정 공간에 생성되는 글의 나열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청중의 수동성은 말에 대한 즉각적 반응보다는 사색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잠재적 행동으로써 기능한다고 본다. 나같이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은 강연을 좋아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원예술’이란 명칭을 좋아하지 않는데, <평범한 이방인>을 놓고 ‘다원적’이다 라고 표현하더라. 즉 퍼포머가 배우들이고 이야기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것이 연극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연극에 관심이 있거나 장르간의 접점에 관심이 있는가?

여전히 다원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영문으로는 Interdisciplinary Art라고 하고 의미상으로는 여러 학문 분야가 관련된, 학제간의 혼성적 예술인 것 같은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또한 연극과 퍼포먼스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다. 물론 그 분야에 대한 존경은 항시 간직하고 있다.

활발히 활동하던 중에 교수가 되었다. 전업작가 시절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공연영상미술학부 의 교수라는 것이 특별히 퍼포먼스나 연극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와 관련있는가? 어떤 수업을 진행하는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학교 업무로 인해 작품에 집중할 시간이 많이 부족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대학 강의와 나의 작품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었고, 그래서 일종의 이중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강의 내용이 나의 작품 속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삶이 매우 지루하기도 하고 일상이 무의미하게 바빠서 소위 예술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강의 내용을 작품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내가 상상하던 대학과 실제 대학은 차이가 있다. 학생들은 취업에 관련된 실무를 원하고 대학과 학부 또한 그러한 내용을 중점으로 교육하고 있다. 나의 교육적 입장과는 전혀 맞지 않지만, 신세계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즐거울 수 있다. 따라서 소속 학부에서 가르치는 연극과 퍼포먼스등은 나의 관심과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있다. 내가 지금 강의를 맡은 교과목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여러 사람들을 오랫동안 웃게 만들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학의 교육, 나아가 소통의 모든 장치에는 비효율적이고 엉성하지만 무언가 재미난 요소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 학교에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학교를 떠날 생각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상상하는 그 이상이 아니다.

티노 세갈(Tino Sehgal)의 경우, 퍼포먼스라고 하지 않고 ‘시추에이션(situation)’이라고 부르고, 미술 작업으로 그런 것(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퍼포먼스)들을 판매하잖아요. 김홍석의 퍼포먼스 작품도 판매가 가능한 건가요? 아니면 이벤트처럼 한 번 일시적으로 하고 끝나는 건가요? 관객참여 프로젝트들 중에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앨런 캐프로같은 경우도 관객이 참여하는 이벤트고. 김홍석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구입할 수 있나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앨런 캐프로나 수잔 레이시(Suzanne Lacy) 같은 작가들은 어떻게 작품을 판매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런 유사한 작업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점 때문에 사진을 많이 남겨요. 저의 <사람 객관적>을 미술관에서 구입하고자 한다면, 행위가 아니라 저의 스크립트를 구입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작품에서 보게 되는 행위 혹은 시추에이션을 미술관에서 구입하기를 원한다면, 스크립트에서 비롯된 모든 행위가 포함되니 그것도 가능할 겁니다. 이때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 인스트럭션이 그것을 대신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스트럭션은 글이나 드로잉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될 거라 여겨지는데, 구매자에게 정확히 그 의미가 전달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본인이 대학의 오너가 되어 이상적인 대학을 만든다면 어떤 대학 어떤 교육일까? 또는 미술대학이나 미술교육은 여전히 필요한가?

craft나 design을 위한 기술적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순수미술에 대한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소위 여러 분야가 연계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나타나길 바란다. 이미 여러 대학에서 기존의 독립된 학문 간의 혼성적 교류가 있는 것처럼 미술을 독립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경제학, 행정학, 철학, 사회학, 윤리학, 의학, 도시공학, 전자공학 등에 포함시켜 교육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교수제를 폐지하고 전문가그룹과 학부형주도 교육을 실행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상하계급적 교육(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시스템은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이 다루어진 이래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라는 이원적 시스템은 변함이 없다. 고등학교까지는 사회에 적응하거나 생존하는 기본적 매뉴얼을 학습하는 것이고, 대학은 국가 공동체가 소속 구성원에게 공동체의 이상에 부합하는 전문인을 양성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 시스템에는 상하 계급적 구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평등한 대화체계를 이루는 교육법이 생성될 경우 경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에 더 가까워 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머리맡에 두고 읽는 책들은 어떤 것들인가?

잠만 잔다.

엉뚱한 질문이다. 만약 경제적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조건이 된다면,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싶은가?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싶은게 혹시 있는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조건이라면 작품 활동을 훨씬 원활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굳이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나라를 건립하여 운영하고 싶다.

podo 의 인터뷰 마지막에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질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새가 나니 하늘에서 새똥이 떨어진다.”와 같이 당연한 일을 또 다시 환기시키는 일이 예술이다. 반면, “지도가 있어 길을 찾기에 수월하군.”과 같이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인식에 균열을 주는 일도 예술이다. 지도의 원기능을 없애거나, 입체지도를 만들거나, 쓸데없는 것을 안내하는 지도를 만드는 일은 감각의 균형에 균열을 주는 일이다. 이러한 균열을 수용하여 또 다른 개념의 지도가 탄생할 경우 그 지도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당연지사를 비판적으로 재현하고 합의된 균형을 공격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