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노트 - 기호의 유전은 경의로운가
김장언
셰익스피어로부터 어떤 글을 인용하는 모든 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구조주의적 인식틀 내부에서 김홍석의 작업을 즐긴다면 그의 작업은 매우 흥미로운 기호학과 미학의 만남으로 읽혀질 수 있다. 김홍석은 그의 작업 'Thump!'에서 김홍석이라는 어떤 주체가 변형되는 과정을 '김홍석 Hongseok Kim gimhongsok GIMHONGSOK 김홍속'으로 보여주었다. 얼핏 이 변화 과정은 문화의 확산과 접촉에 따른 주체와 번역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 변화되는 ‘김홍석’이라는 저자가 창조해낸 사랑과 정액 그리고 치약의 서사구조를 살펴본다면 오히려 그는 번역과 관련된 후기 식민주의적 맥락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그는 비선형적 서사구조가 번역을 통해 유통되는 그 현상 자체를 기호학자처럼 호기심 있게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저자마저도 하나의 기호로 유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석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서사구조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현상을 횡단하면서 아주 낯선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즉 그가 만들어낸 서사 구조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시간 그리고 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존재의 유일성과 확실성이 보장되는 특정 좌표를 향해 나아가지는 않는다. 겐트의 스티브 일화는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환적 서사구조는 바르트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퇴행으로의 강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글쓰기가 곧 상호 연결된 ‘약호의 세계’의 끝없는 유전과정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약호로 옮겨가고 이 약호는 스스로 우리를 다른 약호로 인도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한한 퇴행에 빠지게 되는 구조이다. 이러한 서사구조는 서구의 원근법적 인식체계를 전면에서 부정하면서 우리가 실재하는 삶의 토대가 마술과도 같은 현실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서사의 형식들은 'Marat's Red'와 'Mao met Nixon'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서사구조를 김홍석은 미적 대상물로 가시화하고 그것을 전시장에 보여준다는 데 있다. 더욱이 그는 이러한 미적 대상물을 가시화하는데 매우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창조해 낸 미적 대상물들은 사회가 혹은 미술계가 관례적으로 미적 대상물을 인식하는 가치 평가기준에 벗어난 가치 중립적 기호의 대상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그가 모든 조형적 언술을 극적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이 미적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기호의 유전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서사구조가 하나의 미적 대상물로 우리 앞에 있다. 여기에서 미적 대상물은 조각적 장치, 타이포그래픽적 장치 혹은 그래픽적 장치 모두를 포함하는 모든 시각 이미지 장치를 의미하는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미술이라는 장르적 구조 내부 혹은 사회 구조 내부에서 자신의 서사구조를 미적 대상물이라는 형식으로 봉사하게 한다.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기호의 유전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서사구조가 미적 대상물 즉 작품으로 변형되고, 그 작품이 미술계 혹은 사회라는 구조 내부에서 작품이 아닌 기호로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C.H.I.S -Chronic Historical Interpretation Syndrome’에서 보여 지는 서사구조와 미적 대상물은 둘 사이의 선형적 인과관계 없이 또 다른 구조를 만들어 내며 이것은 다시 전시장 내부에서 관람객들을 만난다. 마라의 피가 방사된 유리상자 역시 그렇다. 특이하게도 우리는 혹은 관객은 이러한 미적 대상물이라는 기호마저도 - 이 기호는 더 이상 관례적인 미적 대상물이 아니다. 즉 비물질적인 것이다- 쉽게 관례적으로 인식하면서 미적 조형물의 가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임의적 서사구조와 임의적 미적 대상물의 임의적 연관관계가 관객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탈각되는 순간이다.
‘O Brother, Where Art Thou?’는 좀 다른 맥락을 제시하는 것 같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기호의 유전과정이 역전된 현상처럼 여겨진다. 영화라는 시각적 서사구조는 임의적으로 발췌되며 그것은 문자라는 기호로 변형됨과 동시에 그 자체가 미적 대상물로 변형된다. 기호의 유전은 임의적으로 확산되며 임의적으로 혼종화된다. 그리고 모든 대상은 맥락적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닌 기호학적 구조의 인자들이 된다.
이 모든 세상의 구성물들은 구조 내부에 존재하는 기호일 수 있을까. 문제는 어쩌면 그 구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Making a Star'에서 - 이 작업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협업이 진행되는 퍼포먼스에서- 김홍석은 기호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기호에게 제공한다. 그 조건들은 사회적 맥락에서 합의된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매우 이성적 구조 내부에서 최소한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작동 가능하도록 배려한다. 스타지망생이라는 기호는 김홍석이 제안한 기호의 장 내부에서 과도할 정도로 충실히 기호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그러나 김홍석은 그 기호의 충실도를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interpreters'와 ’The Seoul Massacre'에서도 어느 정도 이와 유사한 기호의 행동양태가 이루어진다. ‘G5'는 분명 다른 맥락으로 논의를 할 수 있을 여지가 충분하지만 열강의 국가를 제3세계의 언어인 한국어로 번역하고 이것을 다시금 열창하게 하는 맥락에서 우리는 동일하게 - 분명히 열강의 국가가 들리고 있긴 하지만 - 시각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불리어지는 듯한 착각을 받는다. 기호는 구조 내부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일까. 기호들이 구조를 깨트리고 새로운 구조를 생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The Talk'는 상당히 복잡한 기호의 구조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기호의 실험실이다. 물론 김홍석의 많은 작업들은 작업 내외부에 존재하는 ‘기호의 연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기호들이 작업과 제도 그리고 사회 내외부를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다. 이 작업 역시 다양한 기호들의 맥락이 교차되고, 이것은 게임 내부에서 제한된 소통의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좀더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작가에 의해서 조작된 네 가지의 리얼리티가 실재의 현실 속에 실재의 리얼리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허구들이 실재 삶 속에서 불한당처럼 작동된다.
나는 우연히 용산 근처 한 빌딩의 로비에 놓여진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를 보았다. 택시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그것이 서울 모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밀로스의 비너스처럼 이미테이션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곳에 진품이 있을 것이라고 결코 상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약 저 빌딩 로비의 LOVE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그것과 연관된다면, 그것은 가짜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전시장에 놓여진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를 보았다. 작가가 의도한 어떤 맥락을 떠나서 나는 "그럼 그것이 진짜였나?"하는 생각만을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는 일종의 임의적 기호들의 혼종이 이루어지는 환상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방출하는 경이로움은 우리의 존재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흥분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보르헤스
우리는 '사건'의 발달과 전개가 매우 논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거의 모든 사건들은 우연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어처구니없는 확률들, 그리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모순들로 이루어진다. 인과율에 대한 믿음은 일종의 근대적 신화에 대한 믿음일 뿐이지만, 제3세계에 사는 우리들에게 그것은 내외부적으로 구조화되고 강제화된 필수불가결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우리가 상상하는 근대적 주체는 상상의 주체imaginary subject일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전지구가 제3세계로 변화되는 동시대적 사회문화현상에서 우리는 그러한 믿음과 실천원리들이 일종의 허구임을 자각하기보다 또 다른 너머의 진실이 명증하게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생산해 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특권을 쉽게 상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조주의적 인식틀 내부에서 김홍석의 작업을 즐긴다면 그의 작업은 매우 흥미로운 기호학과 미학의 만남으로 읽혀질 수 있다. 김홍석은 그의 작업 'Thump!'에서 김홍석이라는 어떤 주체가 변형되는 과정을 '김홍석 Hongseok Kim gimhongsok GIMHONGSOK 김홍속'으로 보여주었다. 얼핏 이 변화 과정은 문화의 확산과 접촉에 따른 주체와 번역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 변화되는 ‘김홍석’이라는 저자가 창조해낸 사랑과 정액 그리고 치약의 서사구조를 살펴본다면 오히려 그는 번역과 관련된 후기 식민주의적 맥락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그는 비선형적 서사구조가 번역을 통해 유통되는 그 현상 자체를 기호학자처럼 호기심 있게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저자마저도 하나의 기호로 유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석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서사구조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현상을 횡단하면서 아주 낯선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즉 그가 만들어낸 서사 구조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시간 그리고 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존재의 유일성과 확실성이 보장되는 특정 좌표를 향해 나아가지는 않는다. 겐트의 스티브 일화는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환적 서사구조는 바르트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퇴행으로의 강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글쓰기가 곧 상호 연결된 ‘약호의 세계’의 끝없는 유전과정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약호로 옮겨가고 이 약호는 스스로 우리를 다른 약호로 인도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한한 퇴행에 빠지게 되는 구조이다. 이러한 서사구조는 서구의 원근법적 인식체계를 전면에서 부정하면서 우리가 실재하는 삶의 토대가 마술과도 같은 현실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서사의 형식들은 'Marat's Red'와 'Mao met Nixon'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서사구조를 김홍석은 미적 대상물로 가시화하고 그것을 전시장에 보여준다는 데 있다. 더욱이 그는 이러한 미적 대상물을 가시화하는데 매우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창조해 낸 미적 대상물들은 사회가 혹은 미술계가 관례적으로 미적 대상물을 인식하는 가치 평가기준에 벗어난 가치 중립적 기호의 대상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그가 모든 조형적 언술을 극적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이 미적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기호의 유전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서사구조가 하나의 미적 대상물로 우리 앞에 있다. 여기에서 미적 대상물은 조각적 장치, 타이포그래픽적 장치 혹은 그래픽적 장치 모두를 포함하는 모든 시각 이미지 장치를 의미하는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미술이라는 장르적 구조 내부 혹은 사회 구조 내부에서 자신의 서사구조를 미적 대상물이라는 형식으로 봉사하게 한다.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기호의 유전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서사구조가 미적 대상물 즉 작품으로 변형되고, 그 작품이 미술계 혹은 사회라는 구조 내부에서 작품이 아닌 기호로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C.H.I.S -Chronic Historical Interpretation Syndrome’에서 보여 지는 서사구조와 미적 대상물은 둘 사이의 선형적 인과관계 없이 또 다른 구조를 만들어 내며 이것은 다시 전시장 내부에서 관람객들을 만난다. 마라의 피가 방사된 유리상자 역시 그렇다. 특이하게도 우리는 혹은 관객은 이러한 미적 대상물이라는 기호마저도 - 이 기호는 더 이상 관례적인 미적 대상물이 아니다. 즉 비물질적인 것이다- 쉽게 관례적으로 인식하면서 미적 조형물의 가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임의적 서사구조와 임의적 미적 대상물의 임의적 연관관계가 관객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탈각되는 순간이다.
‘O Brother, Where Art Thou?’는 좀 다른 맥락을 제시하는 것 같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기호의 유전과정이 역전된 현상처럼 여겨진다. 영화라는 시각적 서사구조는 임의적으로 발췌되며 그것은 문자라는 기호로 변형됨과 동시에 그 자체가 미적 대상물로 변형된다. 기호의 유전은 임의적으로 확산되며 임의적으로 혼종화된다. 그리고 모든 대상은 맥락적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닌 기호학적 구조의 인자들이 된다.
이 모든 세상의 구성물들은 구조 내부에 존재하는 기호일 수 있을까. 문제는 어쩌면 그 구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Making a Star'에서 - 이 작업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협업이 진행되는 퍼포먼스에서- 김홍석은 기호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기호에게 제공한다. 그 조건들은 사회적 맥락에서 합의된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매우 이성적 구조 내부에서 최소한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작동 가능하도록 배려한다. 스타지망생이라는 기호는 김홍석이 제안한 기호의 장 내부에서 과도할 정도로 충실히 기호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그러나 김홍석은 그 기호의 충실도를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interpreters'와 ’The Seoul Massacre'에서도 어느 정도 이와 유사한 기호의 행동양태가 이루어진다. ‘G5'는 분명 다른 맥락으로 논의를 할 수 있을 여지가 충분하지만 열강의 국가를 제3세계의 언어인 한국어로 번역하고 이것을 다시금 열창하게 하는 맥락에서 우리는 동일하게 - 분명히 열강의 국가가 들리고 있긴 하지만 - 시각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불리어지는 듯한 착각을 받는다. 기호는 구조 내부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일까. 기호들이 구조를 깨트리고 새로운 구조를 생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The Talk'는 상당히 복잡한 기호의 구조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기호의 실험실이다. 물론 김홍석의 많은 작업들은 작업 내외부에 존재하는 ‘기호의 연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기호들이 작업과 제도 그리고 사회 내외부를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다. 이 작업 역시 다양한 기호들의 맥락이 교차되고, 이것은 게임 내부에서 제한된 소통의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좀더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작가에 의해서 조작된 네 가지의 리얼리티가 실재의 현실 속에 실재의 리얼리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허구들이 실재 삶 속에서 불한당처럼 작동된다.
나는 우연히 용산 근처 한 빌딩의 로비에 놓여진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를 보았다. 택시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그것이 서울 모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밀로스의 비너스처럼 이미테이션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곳에 진품이 있을 것이라고 결코 상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약 저 빌딩 로비의 LOVE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그것과 연관된다면, 그것은 가짜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전시장에 놓여진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를 보았다. 작가가 의도한 어떤 맥락을 떠나서 나는 "그럼 그것이 진짜였나?"하는 생각만을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는 일종의 임의적 기호들의 혼종이 이루어지는 환상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방출하는 경이로움은 우리의 존재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흥분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