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nversation About Nothing Serious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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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nversation About Nothing Serious


심각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화


︎︎︎A Conversation About Nothing Serious 중년남자 K: 저기 실례합니다. 당신은 왜 입을 벌리고 있나요?

K (middle-aged, male): Excuse me, sir. Why do you have your mouth open?




중년남자 M: (한 동안 말이 없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M (middle-aged, male): (remains speechless for a while) I’m in the middle of receiving something from God.




K: 하느님이요? 그럼, 무얼 받고 계십니까?

K: From God? Please tell me, what is it that you’re receiving?




M: 하느님으로부터 믿음을 받고 있습니다.

M: I’m receiving faith from God.




K: 목회자님이시군요?

K: So you’re a priest?




M: 맞습니다. 그러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M: Yes, indeed I am. What about yourself?




K: 저는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K: I’m a philosophy professor.




M: 대단한 일을 하시는 군요.

M: That’s a great profession that you have.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After a moment of silence)




K: 어떤 믿음을 구하시려고 하십니까?

K: What kind of faith are you seeking?




M: 믿음 그 자체요.

M: Just faith itself.




K: 실례되는 말이지만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믿음은 없습니다. 마치 세상이 없는 것처럼요.

K: Not to be disrespectful, but philosophically speaking, there is no such thing as faith. Just as there is no world.




M: 믿음이 없다니요? 무슨 가당치 않은 말씀을 하십니까?

M: What do you mean there’s no faith? How could you say such nonsense?




K: 믿음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약속한 것 뿐이지 믿음이란 그 자체는 없습니다.

K: We made an agreement on the concept of faith, but in fact, there’s no faith itself.




M: 당신은 정말 재수없게 말하는 재주가 있군요. 그럼 믿음 말고 없는 것을 더 말씀해 주시지요.

M: You’re really full of yourself. Why don’t you tell me more of those things, other than faith, that do not exist.




K: 눈에 보이는 사과도 없는 것이고, 눈에 안보이는 정의도 없는 것입니다.

K: An apple, which is visible to the eye, as well as the invisible concept of justice, both don’t exist.




M: 그러니까 교수님 말대로라면, 인간끼리 약속한 언어이자 의미일 뿐 실재로는 없다는 것이죠?

M: So according to you professor, these don’t exist and are mere manmade linguistic agreements with assigned meanings?




K: 그런 셈입니다.

K: That would be the case.




M: 그렇다면 교수님은 어떻게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십니까? 철학은 실재로 없는 것인데?

M: Then how do you teach philosophy to your students? If philosophy doesn’t exist?




K: 그런 뜻이 아닙니다. 믿음 말씀하시길래, 믿음은 허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려 했던 겁니다. 시작, 끝, 지금이란 단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걷기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죠. 걸음을 걷기 전은 시작한 것이 아니고, 걸음을 걸으면 시작한 후입니다. 그러니 시작 그 자체는 없는 것이죠. 이렇듯 인간은 언어를 만들어 내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가짜의 현상과 감각도 만들어 내죠.

K: That’s not what I meant. Since you mentioned faith, I just wished to tell you that faith is an illusion. The words we are familiar with, such as “beginning”, “end”, and “now” don’t exist. Let’s hypothesize that someone is about to begin to walk. This person hasn’t begun before he takes the first step, and when he walks, it’s after he has begun, so strictly speaking, the state of “beginning” doesn’t exist. Human beings have created language as well as false phenomena and sensations in order to facilitate their own understandings.




M: 그럼 다시 말하지요. 저는 하느님과 약속한 ‘개념’인 ‘믿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저의 믿음이요. 당신 방식대로라면 ‘우리가 약속한 개념인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우리가 약속한 개념인 믿음 그 자체’를 통해 ‘우리가 약속한 개념인 나라는 자체’가 믿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되는 건가요?

M: Let me rephrase what I said then. I believe in “faith” as a “concept” that I pledged to God. I mean the faith that I have in God. According to your argument, I should say “I itself as a concept that we have agreed upon” believe in “God itself as a concept that we have agreed upon” through the means of “faith itself as a concept that we have agreed upon”?




K: 그러고 보니 제가 좀 무례했네요. 미안합니다. 철학자들의 버릇입니다.

K: Coming to think of it, I was a bit impertinent. My apologies. It’s an old habit of us philosophers.




M: 저는 믿음이 보입니다. 물론 당신이 말한 개념도 보이구요.

M: To me, faith is visible and so are the concepts you have mentioned.




K: 저는 책상이나 내 처는 보이는데 믿음과 개념은 보이지 않는군요.

K: To me, a desk and my wife are visible but not faith or other concepts.




M: 당연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은 많이 배운 사람이니 믿음이 무엇인지는 아실 것 아닙니까?

M: Of course. You see them with your mind, not with your eyes. You’re an educated person, I trust you’d know what faith is?




K: 당신이 보인다는 의미는 그 뜻을 알고 있다는 말이군요. 하지만 믿음은 여전히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까 말한대로 믿음은 우리가 합의하에 믿음이라는 단어로 쓰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K: So when you say that something is visible to you, it means you know the meaning of it. Faith is still nonexistent. Not because you can’t see it with your eyes but because, as I said, we use the word “faith” based on our agreement of its meaning.




M: 자꾸 당신의 전공인 철학으로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단지 그 믿음에 대한 해석은 각각 다르다고 말하는 게 어떨까요? 아무튼 당신은 믿음이 없다고 아무리 말 한들 나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믿음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M: Why don't you stop trying to philosophically persuade me and just admit that our interpretations of faith are different? No matter how much you repudiate the existence of faith, many people, including myself, not only understand faith but also believe in its existence.  




K: 우리의 의견은 굉장히 다르군요. 당신의 말이 진리이고 나의 말도 진리라면 결국 우리의 대화는 충돌한 셈이군요.

K: Our opinions are vastly different. If your words were truth and so were mine, it seems we have a conflict in our conversation.




M: 그럼 내 말이 진리가 아닌 해석이 다를 뿐이라면 우린 싸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나요?

M: If my words were not truth but an alternative interpretation, can we continue this conversation without conflict?




K: 아니요. 같은 의미이니 계속 대립할 것 같습니다.

K: No, since they mean the same thing, I think the conflict will continue.




M: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만.

M: I don’t understand what you mean.




K: 진리와 해석이 같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 즉 당신이 참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내가 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동일한 참, 즉 동일한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K: I’m not saying truth and interpretation are the same. What I’m saying is that what you consider to be true and what I consider to be true are not the same truth.




M: 그럼, 무엇입니까?

M: Then what is it?




K: 연인들의 사랑의 충돌이랄까요?

K: Consider it a lovers’ quarrel?




M: 풀어서 설명해 주십시오.

M: Care to you elaborate on it?




K: A라는 남자와 B라는 여자는 서로 사랑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가끔 다투는 일이 있죠. 그런 다툼은 사소하여 금방 화해할 수도 있지만, 크게 대립하여 한 동안 연락도 안하고 심지어 헤어지기도 합니다. A라는 남자는 자신이 믿는 사랑이 진리였던 것이고, B라는 여자는 자신이 믿는 사랑이 진리였던 겁니다. 그러니 어떤 생각에 대해 진리라고 믿는 순간 그것은 자신만의 진리일 뿐입니다. 이것은 강하게 주장하게 되면 충돌이 일어나게 되죠. 마치 인간들이 언제나 전쟁을 일으키는 것처럼요.

K: Let’s say a male A and a female B are in love with each other. There will be moments of conflict. Petty fights can be quickly resolved but bigger conflicts could last for a while and even lead to their breakup. To A, the love he believed in was the truth, and to B, her love the truth. So when you begin to consider something as the truth, it is really just your own projection. The more stubborn you are about your opinion, the bigger the conflict. Just like how humans are always prone to wage war.




M: 할렐루야. 악마의 속삭임이군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왜 굳이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M: Hallelujah. So it’s the devil’s whisper. If God’s own words are not the truth, why would we believe in Him and follow His words to begin with?




K: 하나님은 분명 진리를 말씀하셨을 겁니다. 단지 우리가 그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문자를 통해 인간들은 상상을 하고, 상상을 통해 이야기를 해석하고, 해석된 이야기는 계속 후대에 내려오면서 또 다시 변형되고 다른 상상력이 더해집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이러한 굉장한 능력이 결국 인간의 늪이 되어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K: God must have spoken the truth. I just think we might have misinterpreted His words. Based on the letters we created, we imagined things, and through our imaginations, we interpreted the stories. These interpreted stories transformed and acquired additional layers of imagination as they were passed down through generations. In other words, this astonishing ability of human beings to create something out of what’s invisible becomes our own trap that propels us to fight with each other.




M: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지만 인간들이 성경을 통해 해석을 잘못하고 있다는 말은 수천년 동안 이단들이 해 오던 말입니다. 교수님도 그 중에 한 명일 뿐입니다. 저는 동물과 다르게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머리를 통해 이미지를 상상하고, 가슴을 통해 감정을 품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M: For thousands of years, heretics have been saying that God’s words are truth, but humans have misinterpreted them through the Bible. You’re just one of them. I marvel at the human ability to believe in things that are invisible. Unlike other animals, we have the brains to imagine, give these invisible things an image, and harbor emotions in our hearts. It is a true gift God has given us.    




K: 그럼, 철학은 더 이상 할 일이 없네요. 그 동안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 관념, 경험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체계화하려 노력했습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생로병사를 인간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K: Then philosophy has no use any longer. Philosophers for ages have endeavored to prove and systemize human cognition, ideologies, and experiences. You can’t fathom all the rules of the universe and the complexity of human life just with the power to imagine invisible things.




M: 그럼 왜 아직도 종교가 인간에게 큰 영향을 끼칠까요? 심지어 철학은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 분야 같아 보입니다만.

M: Then why does religion still have such huge impact on humans? While, it seems, no one is really interested in the study of philosophy.  




K: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종교는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통해 황홀함과 무서움, 아름다움과 더러움, 선함과 죄를 설명하죠. 이건 일종의 신화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기존의 이론을 반박하는 것을 통해 세상의 이치, 사회의 변화, 인간의 조건등을 항상 연구하지요.

K: Forgive me for saying this but perhaps because it gives us illusions? Religion explains, in a very approachable language, ecstasy and dread, beauty and filth, and goodness and sin. It offers a kind of mythology. On the other hand, philosophy provides logical proofs and refutes existing theories to study the way of the world, the shifts in our society, the human condition, and so forth.    




M: 그렇겠죠.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서사입니다. 이 서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며, 어떤 희망을 품고 그 고된 삶을 살아 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해답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철학과 같이 인간의 인식체계를 연구하거나, 뇌과학에서 뇌구조를 분석하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어차피 그런 연구를 통해 인간의 실체를 규명한다고 인간이 서사를 떠나 살 수는 없습니다.

M: Sure, but human life itself is a narrative. Without narratives, there is no joy, no hope, and why would people continue such strenuous existence? This is why we listen to their stories and offer them God’s stories in return as an answer. It’s different from studying the human cognitive system as in philosophy and analyzing the brain system as in brain science. Even if these studies investigate the essence of humanity, humans can’t live without narratives.  




K: 그럼, 당신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있군요?

K: Then you must believe in God’s existence?




M: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의 아버지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믿습니다. 다른 목회자는 절대적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은 술이기도 하고, 기분 좋은 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꿈이란 추상이고, 추상이란 사유의 궁극적 단계를 말합니다.

M: I don’t believe in the crucified Jesus and his Father per se, but God as an abstract presence. Other priest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the Absolute God. However, I see God in wine as well as in a pleasant dream. Here, a dream is an abstraction, and abstraction is the ultimate stage in the process of reasoning.




K: 이건 불교에서 말하는 개인이 부처가 된다는 것과 같아 보이는데요?

K: It sounds similar to how, as they say in Buddhism, a man can become a Buddha?




M: 참선을 통해 극강의 희열을 얻고자 하거나 혹은 도를 깨우치는 그 찰나를 느끼기 위해 거쳐야 하는 그 과정자체가 고통인데 내가 왜 부처가 되어야겠습니까? 차라리 마라톤을 10시간하여 엑스타시를 느끼던가, LSD를 먹겠죠.

M: Why should I even try to become a Buddha if the process to achieve the ultimate state of ecstasy through meditation or to reach the instant of enlightenment is agony? I’d rather run a 10-hour long marathon or take LSD to feel that ecstasy.




K: 목회자님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단어들입니다. 하하하하. 정리하자면 하느님은 고통을 줄여 주는 환상일 수도 있나요?

K: What unlikely words to have come from a priest! Hahahaha. So in a nutshell, can your God be an illusion that alleviates agony?




M: 그건 아닙니다. 추상적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M: That’s not the case. Like I said, it’s an abstract subject.




K: 철학에서는 추상을 사유의 단계로 보고, 사유의 상위 개념을 철학으로 보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철학보다 못한 건가요? 하하하하.

K: Philosophy considers abstraction as a stage in reasoning, and the superior concept to reasoning is philosophy. Does that make the words of God inferior to philosophy? Hahahaha.




M: 그건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정한 규칙이고 나는 하나님의 존재는 추상이고 그것은 극단의 이성과 감성체계를 이해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단계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회자의 입을 통해 인간들의 삶의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 설명하지요. 그 이야기는 쉽고 상상이 가득하고, 듣고 나면 희열과 열정이 가득해지는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쉽고 간결합니까?

M: That’s according to the rules set by philosophy as a field of study. What I mean is that the existence of God is abstract, which can only be grasped by those who have achieved the deepest understanding in the systems of reasoning and sensibilities. God, however, explains the history of humanity in the form of narratives through priests. These stories are straightforward and imaginative and fill the audience with joy and passion. How easy and simple is that?   




K: 철학에서는 인간이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지식에 대한 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식을 통해 논리적 사고와 대상에 대한 분석의 힘을 기르면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궁극적 사유의 끝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인간은 행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파악하고 이해해야 자신을 조절하고 제어할 힘을 얻게 되죠. 그 단계에 이르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이상의 이상적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철학에서 말하는 추상의 단계입니다.

K: In philosophy, we say that humans need to be trained with knowledge in order to obtain happiness. That one can reach the ultimate stage of human reasoning by strengthening logical thinking and analytical skills through knowledge. This is how humans can truly understand happiness. In other words, you need to have a better understanding of yourself to have the power to control yourself. Once you’ve reached that stage, you’re in the ideal state that surpasses all the happiness pursued by mankind, and this is the state of abstraction we talk about in philosophy.    




M: 하느님을 믿는 사람 입장에선 그 방법과 개념은 평범한 우리에겐 너무 어렵습니다. 나는 가난하거나 무지한 자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들과 유대를 맺고 그들이 점차 변해 가는 것을 볼 때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이 생겨 납니다. 기쁨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고, 자아도취성 자만도 아닌 어떤 감정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나만의 감정이지만 그들과 같은 지점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대감,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들에게 지식의 훈련과 추상의 이해는 사치라 느껴집니다.

M: As a man of faith, the process and concept you mentioned seem too complex for an ordinary person. I meet a lot of impoverished and uneducated people. Once I build ties with them and watch them change over time, I get this feeling that you can’t possibly describe. It’s not joy, happiness, or some narcissistic pride. It’s a different feeling altogether and entirely my own. I have to embrace their perspectives in order to see what they are seeing. Building a sense of camaraderie is crucial. To these people, understanding the concept of abstraction and knowledge training would be extravagant.




K: 고대 중국의 노자말을 기록한 도덕경에 ‘정말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고, 정말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으며, 정말 큰 음은 소리가 없고, 정말 큰 형상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건 도를 설명한 예입니다. 도는 감춰져서 이름이 없지만, 오직 도만이 잘 시작하고 잘 끝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감각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유에 단련된 이들은 이해가 가능합니다.

K: According to Tao Te Ching, a compilation of Chinese sage Laozi’s aphorisms, “the great square has no corners; the great plate cannot be made; great sound is hard to hear, the great form has no shape.” This is an example of his Tao. What it means is that Tao is hidden and has no name, but only Tao can bring about a good start and a good end.

This concep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with your senses because it’s abstract. But those who are trained in reasoning can.




M: 하하하하. 그렇다면 ‘정말 추운 것은 더운 것이며, 눈으로 보이지 않게 작은 것은 태산과 같다.’라고 나도 한마디 해보죠. 이것 너무 재미있어서 게임으로 만들어도 되겠는데요?

M: Hahahaha. Then let me add an aphorism of my own, “what’s really cold is hot, and what is too small to be seen is as large as a mountain.” This is so entertaining I think we could make a game out of it.




K: 장난이 심하시군요. 그의 말은 이것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감각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유에 단련된 이들은 이해가 가능합니다.

K: You’re being facetious. His words are too abstract to be grasped by the senses, and only those trained in reasoning can understand them.




M: 아니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린 지금 추상이라는 공통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저는 상상력과 서사로 교수님은 사유와 논리로 세상과 인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M: No, it is impossible. We’re both using the word “abstract” to explain the world and humanity but I by means of imagination and narrative and you professor in terms of reason and logic.  




K: 맞아요. 잘 보셨어요. 정말 다르군요.

K: Yes, you’re correct. How very different.




M: 그렇지만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왜 행복을 구현하려 하는지, 행복은 무엇인지 사유로 단련된 철학에서 해결한 것이 있나요?

M: So tell me if this reason-trained philosophy has ever resolved the question of why human beings strive to seek happiness and what this happiness is about?




K: 행복은 인간의 조건과 정반대니까요.

K: It’s because happiness is the exact opposite of the human condition.




M: 이해하기 좀 어렵지만, 교수님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군요.

M: I find it difficult to understand, yet I already don’t agree with you professor.




K: 행복이란 없는 겁니다. 원래 없어요.

K: Happiness doesn’t exist. It never has.




M: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부자에게도 없고 하느님을 독실히 믿는 이들에게도 없다?

M: For no one? Not even for the wealthiest or devout believers?




K: 예.

K: Precisely.




M: 우리가 어쩌다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었나요? 태초부터 그렇다는 건가요?

M: How did we get into this predicament? Or have we been this way since the very beginning?




K: 우리는 곤경에서 태어난 겁니다. 고통과 인간 운명은 같은 말입니다.

K: We were born out of agony. Agony and human fate are synonymous.




M: 이해가 어렵습니다. 좀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M: I don’t understand. Would you please elaborate?




K: 괴로움과 행복감은 인간적이죠? 이걸 우린 자연적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는 아닙니다. 동물들의 괴로움과 인간의 괴로움을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자연과 달리 문명을 창조했습니다. 물론 인간은 자연에 포함되는 건 자명하지만 인간이 만든 문명에 더 친숙합니다. 그런데 문명이 뭘까요? 인간은 호기심과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에 동물과 다르게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었죠. 그래서 최초의 인간은 불을 발견했고, 바퀴를 만들어 냈습니다. 최초로 발견한 인간들은 최초의 만들어진 불을 보고, 최초로 굴러가는 바퀴를 보고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감동스럽고 황홀합니다. 문자를 만들어 낸 것처럼 인간은 지금도 새로운 지식을 갈망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명체계에 대해 공부하고 해석합니다.

새로운 지식은 곧 시작이자, 창조를 뜻하죠. 그렇지만 새로운 시작을 찾아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아마 인간을 흙으로 빗어 창조하신 하느님은 이런 창조의 어려움을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게 인간에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신과 같은 이러한 능력말입니다.

K: We consider the feelings of pain and happiness human, right? We even call them natural but to be accurate, they are not. Because the pain felt by animals and humans are different. Why is that so? Unlike nature, humans have created civilization. It’s self-evident that humans are part of nature but we are closer to the civilization we have created. What is civilization anyways? Humans, unlike animals, were able to create civilization, thanks to their curiosity and imagination. Early humans discovered fire and invented wheels. Can you imagine the excitement at the first sight of fire or a rolling wheel? Even just imagining that very moment is stirring. With the same enthusiasm that brought about the invention of written language, we still thirst for new knowledge. We continue to study and offer our interpretations of nature and new civilizations.

New knowledge refers to a new beginning and a new creation, but to discover a new beginning is a very difficult task. God, as someone who created humans out of soil, would know the difficulty of creation. How would a mere human being achieve this godlike ability?




M: 바로 이 지점이 하느님이 등장하는 곳입니다. 인간의 신과 같은 능력.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상상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 상상으로 서사를 만들었고, 서사를 만들 줄 알게 되니 문명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불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 인간인 것은 바로 하느님이 부여하신 인간에 대한 능력, 즉 관찰과 응용력 덕분입니다. 이건 상상의 힘으로 가능한 거죠. 상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요.

M: This is the part where God enters. This godlike ability of mankind. We owe it to our ability to imagine, which is a gift from God. We created narratives based on our imaginations, and because of this ability to narrativize, we were able to create civilization. Humans were able to discover fire for the first time precisely because of the God-given ability to observe and apply the acquired knowledge. This was possible because of the power to imagine. Imagination is invisible, just as God is invisible to our eyes.




K: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더 힘이 센 것이 분명해 보이는 군요. 맞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사고할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를 상상하기도 하지만, 기하학을 통해 도면을 만들고, 도면을 통해 고층빌딩을 짓기도 합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추상입니다. 추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각보다는 사유가 필요한 법입니다.

K: Then what can’t be seen certainly has more power than what can be seen. You’re right. Humans can think about invisible things. We not only have the ability to imagine invisible demons but also to create a blueprint based on geometry to construct a high-rise building. We call such invisible things abstract. In order to understand the abstract, we need reasoning rather than the senses.




M: 도대체 사유가 뮙니까?

M: What exactly is reasoning?




K: 지식의 총합이라고 할까요? 지식은 아시다시피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식이야 말로 추상적이죠. 그런데 감각은 인간이 현상세계를 접촉할 때 사용하는 능력입니다. 즉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추상적 사고와 설명을 사유라고 합니다. 이런 관념은 추상적이라서 구체화할 수 없습니다. 구체화할 수 있는 건 감각이지요.

K: The totality of knowledge? Obviously, knowledge is invisible. Knowledge, above all, is abstract. The senses, on the other hand, are what humans use when in contact with the phenomena of the lifeworld. In other words, reasoning is a process of abstract thinking that explains the phenomena of the lifeworld. Such ideas are too abstract to be concretized. Senses, on the other hand, can be.




M: 정리하자면 지식은 추상세계이고, 감각은 현상세계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M: So to summarize, knowledge is part of the abstract lifeworld and senses the phenomenal lifeworld.




K: 아주 훌륭합니다. 방금 당신은 해석이라는 고도의 추상적 사고를 한 겁니다.

K: Brilliant. You just exercised the highest degree of abstract thinking called interpretation.




M: 하하하하

M: Hahahaha




K: 왜 웃으시죠?

K: Why do you laugh?




M: 칭찬받으니 기뻐서 웃었습니다. 하느님은 칭찬해 주신 적이 없거든요.

M: I felt flattered by your compliments. God hasn’t paid any compliments to me.




K: 하느님은 좀 야박하시군요. 아니면 너무 엄하시던가.

K: God seems a bit merciless or too strict.




M: 하나만 묻겠습니다. 죽음을 철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유로써 죽음을 설명할 수 있나요? 죽음은 사유를 통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자연 그 자체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죽음은 감각의 문제이고 추상적이지 않단 말이 되는데 이건 모순이지 않나요?

M: Let me ask you a question. How does philosophy explain death? Can death be explained by reasoning? Isn’t death part of nature rather than something that we accept through reasoning? That means death is a matter of senses, and not abstract, which sounds like a contradiction?




K: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주시겠습니까?

K: Could you put your question in more concrete terms?




M: 죽음은 감각적인가? 사유적인가? 죽음이 문명이 아닌 자연이라면 현상세계일테고 그렇다면 감각일텐데, 교수님은 죽음이라는 관념도 사유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목숨이 끊기 후 죽은 자신을 보며 말합니다. “아냐, 죽음을 사유로써 분석하고 연구해 봤자 죽음은 자연 그 자체였어. 난 죽음을 통해 자연의 세계로 돌아간 것뿐이야” 하며 자조하지 않을까요? 죽음 이후의 일은 하느님의 인도로 천상에 가는 것이 아니라면, 죽은 이의 자조는 들을 수조차 없지 않습니까? 이 자조 조차도 죽은 이가 아닌 살아 있는 이들이 하는 상상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죽음 이전은 사유체계이고, 죽음 자체는 현상체계이고, 죽음 이후는 타인에 의한 사유체계란 말인가요?

M: Does death lie in the realm of sensations or reasoning? If death is a matter of nature, not of civilization, it belongs to the phenomenal lifeworld, meaning the realm of sensations. According to you, however, death as an idea must be reasoned. Let’s say a philosopher looks back at himself after his own death. Wouldn’t he ruefully observe, “Even if we analyzed death with reasoning, death was nature itself. I just returned to nature by means of death”? If we are destined to go to heaven through the guidance of God, we can’t even listen to the regrets of the dead. These regrets are also mere imaginations of the living. So the life before death can be categorized as part of the system of reasoning, death itself the phenomenal system, and after-death the system of reasoning by others?

   

K: 고통은 감각입니다. 사유가 아닌 감각인거죠. 죽음은 자연의 일부이지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자연으로 대하지 않죠. 인간은 죽음을 관념으로 대합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글로 남겼겠죠. 그러니까 고통, 사랑, 슬픔, 기쁨은 감각이지만, 이러한 것을 관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이란 말입니다. 죽음에 성스럽고, 아름다움을 주입할 수 있는 서사를 우리 인간은 얼마나 좋아합니까? 이걸 거부하긴 힘듭니다. 이미 목사님께서 서사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셨지 않습니까?

K: Pain is a sensation and not a thought. Death is part of nature and not of a manmade civilization. But human beings don’t regard death as part of nature. Humans consider death as an idea, which is why many have spoken and written about the subject. In other words, pain, love, grief, and happiness are sensations but humans elevate them to ideas. How often do we find ourselves mesmerized by the narratives that imbue death with sanctity and beauty? We can’t deny this fact. You’ve explained enough about the importance of narratives, no?




M: 교수님, 저는 이제껏 인생이란 짜인 운명이고, 인간은 상상과 환상이 없으면 고통으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말했던 겁니다. 가정, 행복, 노동, 성공, 안정 이런 건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인간들은 믿습니다. 인간이 고층 빌딩, 자동차, 컴퓨터 같은 걸 만들 수 있었던 건, 바로 고통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상상과 환상을 하느님이 인간에게, 인간은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쳐서 그런 겁니다. 모든 학교에서 고통을 가르치던 가요? 고통이 삶이 중심이라고 알려주던 가요? 아니죠.

M: Professor, what I’ve been saying so far is that life plays out by destiny, and that humans would wither in pain without imagination and illusion. The concepts of home, happiness, labor, success, and stability are all part of a manmade illusion but humans believe that these are gifts from God. Humans were able to make things like high-rise buildings, automobiles, and computers because God planted in humans, and they in their children, the imagination and illusion that there is something more valuable than pain. Have you seen any school teach about pain and that pain is the core of life? No.




K: 하느님이 거짓의 환상을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주지 않았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우린 세계적 기업의 CEO를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엄청난 능력으로 상상도 못하는 연봉을 받는 스포츠맨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깊숙한 마음에는 불안, 걱정, 슬픔이라는 고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인간은 모두 애써 감추고 있는건지 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왜 이런 고통을 인간에게 심어 주었나요?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있어야, 혹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인간의 삶이고 천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 걸까요? 그런데 인간은 왜 똑똑한 사람, 아둔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부자인 사람,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나요? 목사님이 설명한 그 아름다운 인간의 서사는 왜 이토록 잔인한 계급이 있는 건가요?

K: I’d like to believe that God didn’t plant a false illusion in humans. We regard the CEOs of some major global conglomerates as successful and envy the athletes who get paid millions. But who knows if in the depths of their hearts lie pain like anxiety, worries, and grief? Maybe all humans go to great lengths to mask their pain. Why did God give us such pain? Is God telling us that we need to have strength to overcome pain or faith in God to live a truthful life that leads us to heaven? Why do each of us have to live either as a smart, ignorant, distinguished, foolish, rich, or poor existence? Why does your beautiful human narrative have such a brutal hierarchy?




M: 도대체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이 교수님의 말을 이해나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하느님을 믿든 아니든, 난 인간의 꿈, 제 멋대로의 꿈이 그나마 삶을 지켜준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추상적이 아니라 실재적이고 자연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상상력을 더해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것이 훨씬 세상을 해석하기 편하지 않을까요?

M: Do you think the poor and the uneducated would even understand your words? Whether we believe in God or not, I believe that our dreams, all our wayward dreams, protect our existence at the least. Death is not abstract but real and natural. It does make it a lot easier to interpret the world by grieving and commemorating the dead based on our imaginations, no?




K: 알고 보면 저와 비슷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유의 단계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점이 저와 차이가 있습니다.

K: Our logics are connected when you think about it. But it’s different in that I think humans must face death at the stage of reasoning in order to liberate oneself from the fear of death.




M: 난 죽음은 단순한 자연적 소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아멘. 죽음 이전에 소란을 피우듯 별 아름다운 말을 지껄여도 죽음 이후는 바로 소멸이 되는 거라 믿습니다. 남들이 어떤 이의 죽음을 기억해 준다 한들, 그들도 언젠가 소멸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M: I regard death as a mere natural extinction. God have mercy on me. Amen. Even if you create a stir by uttering some beautiful gibberish before your death, once you’re dead you immediately become extinct. Others may remember your death, but obviously, they will all perish at some point too.




K: 죽음을 문명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신 거군요.

K: So you have concluded that death is a return from civilization to nature.




M: 끝까지 우리의 대화에서 철학으로 귀결시키시려 하시는 군요.

M: You’re trying to conclude our conversation on philosophical terms until the very end.




K: 하하하하

K: Hahahaha




M: 왜 웃으시죠?

M: Why are you laughing?




K: 비꼬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진리는 충돌하고 말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K: I’m not being sarcastic here. I couldn’t help but laugh because our truths have ended up in conflict.




M: 하하하하

M: Hahahaha




K: 왜 웃으시죠?

K: Why are you laughing?




M: 저는 반대로 우리가 나눈 대화가 같은 내용인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M: I laughed because I, on the contrary, think we are talking about the same thing in our conversation.




(정적)

(silence)




K: 이렇게 우리가 대화한 것만으로도 멋진 일이지만 제가 경솔하고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K: Just the fact that we had this conversation is brilliant, but I admit I was indiscreet and inadequate in my knowledge.




M: 저의 믿음이 부족하여 형제를 이해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멘.

M: And I lacked the faith to fully convince you, my brother. Amen.




K: 하하하하하하

K: Hahahahahaha




M: 하하하하하하

M: Hahahahahaha







The end




Text: Gimhongsok, Aug. 2021

Text by Gimghongsok, Aug 2021